취향과 예산을 알려주면 상품을 고르고 결제까지 해주는 AI. 소비자에게는 검색창과 쇼핑 앱을 오가는 수고를 덜어줄 서비스다. 그런데 구매를 부탁받은 AI가 정작 쇼핑몰에 접속하지 못한다면 어떨까. 고객은 물건을 사겠다고 했지만, 판매자가 그 구매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이다.
아마존과 퍼플렉시티의 갈등이 그렇다. 아마존은 2025년 11월 퍼플렉시티의 AI 브라우저 Comet에 자사 사이트를 이용한 대리구매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외부 서비스는 자신의 정체를 투명하게 밝히고, 판매자가 참여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Comet을 통한 쇼핑과 고객지원의 품질에도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고객으로서는 의아하다. 내 계정과 돈으로 물건을 사는데, AI에게 주문을 부탁했다는 이유로 막을 수 있을까. 판매자에게도 질문이 있다. 고객이 어떤 권한을 줬는지 확인할 수 없는 프로그램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고객이 구매를 맡기는 것과 판매자가 그 주문 방식을 허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결정이다. 에이전트 커머스 사업자는 고객과 판매자 양쪽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아마존의 거부는 그동안 편리한 쇼핑 기능에 가려져 있던 이 조건을 드러냈다.
교훈 1. 고객의 허락만으로 판매자의 동의까지 얻을 수는 없다
사람이 직접 쇼핑할 때는 상품을 확인하고 주문 버튼을 누른다. 에이전트가 대신 구매하면 고객의 지시를 해석하고 상품을 선택하는 과정이 하나 더 생긴다. 판매자는 그 과정에서 고객이 무엇을 허락했는지 알기 어렵다.
“배송비까지 15만원 안에서 운동화를 사줘”라는 부탁을 생각해보자. 예산 외에도 사이즈와 색상, 배송일, 반품 가능 여부를 정해야 한다. 에이전트가 가격에 맞춰 반품 불가 상품을 골랐다면 고객은 그런 조건까지 승인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판매자는 명시된 조건에 따라 정상적으로 주문을 받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고객의 결제수단이 유효한지 확인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에이전트가 고객에게 어떤 지시를 받았고, 그 범위 안에서 주문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아마존은 공식 입장에서 음식 배달과 여행 예약 서비스를 예로 들었다. 고객을 대신해 거래하는 외부 서비스도 정체를 밝히고, 거래 상대방의 참여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다. Comet의 고객지원 품질에 대한 비판은 아마존 측 주장으로 구분해야 하지만, 외부 서비스에 요구하는 원칙은 분명하다. 고객의 부탁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사 사이트의 이용 조건을 건너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마존은 고객이 에이전트에게 부여한 구매 권한을 자사 서비스에 대한 접근 허가와 동일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이 구분을 이해해야 뒤이어 등장한 자체 대리구매 서비스도 설명할 수 있다.
교훈 2. 아마존도 대신 사준다. 고객이 머무는 곳은 아마존이다
아마존은 자체 대리구매 기능인 ‘Buy for Me’를 선보였다. 아마존에서 판매하지 않는 일부 상품을 외부 브랜드 사이트에서 대신 주문하는 서비스다.
고객은 아마존 앱에서 상품 정보를 확인한다. 구매하기로 결정하면 배송지와 세금·배송비·결제수단을 검토하고 주문을 요청한다. 이후 AI가 브랜드 사이트에서 구매를 실행한다. 주문 확인은 브랜드가 보내고, 배송과 반품·교환·고객지원도 해당 브랜드가 맡는다. 아마존은 브랜드에도 참여 여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한다.
외부 에이전트의 접근에는 제동을 걸면서, 자사 앱에서는 외부 쇼핑몰의 상품을 대신 사준다. 두 경우에 아마존이 차지하는 위치가 다르다. Buy for Me에서는 고객이 아마존 앱에서 상품을 살펴보고 구매를 확인한다. 상품을 공급하는 곳이 외부 브랜드여도 아마존은 고객과의 접점을 유지한다.
반면 외부 에이전트가 여러 쇼핑몰에서 상품을 비교한 뒤 아마존에 주문만 넣는다면, 고객은 아마존의 검색 결과와 추천을 직접 살펴볼 필요가 줄어든다. 쇼핑몰이 고객에게 상품을 노출하고 광고를 보여줄 기회도 줄어들 수 있다.
여기에는 보안과 고객 경험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고객 관계와 수익을 둘러싼 이해관계도 존재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만 광고 수익을 지키려는 목적이 Comet 차단의 결정적 이유였다고 확인된 것은 아니다.
아마존의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리구매 기술을 제공하면서도 외부 사업자가 자사 고객에게 접근하는 방식에는 제한을 둘 수 있다는 점이다. 누가 고객에게 상품을 제시하고, 누가 주문 절차를 정하며, 구매 이후에는 어디에서 고객을 응대할지가 사업자마다 중요해진다.
교훈 3. 구매 권한을 증명해도 거래 합의는 남는다
결제업계는 에이전트가 고객의 지시를 따랐는지 확인할 수 있는 체계를 개발하고 있다. 판매자가 고객의 구매 의사를 추측하는 대신, 승인 내용을 검증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구글이 2025년 9월 발표한 Agent Payments Protocol, AP2는 사용자의 구매 지시와 승인을 전자서명된 기록으로 남기는 방식을 제안했다. 고객이 주문 직전에 확인하는 구매와, 조건을 미리 정하고 실행을 맡기는 구매를 구분한다.
예를 들어 고객이 에이전트가 고른 운동화와 최종 가격을 확인한 뒤 승인했다면,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다. 공연 티켓을 판매 시작과 동시에 사도록 맡겼다면, 미리 허용한 조건을 확인할 근거가 필요하다. 고객이 구매 순간에 화면을 보고 있지 않더라도 승인 범위를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다.
비자는 같은 해 10월 Cloudflare와 함께 Trusted Agent Protocol을 공개했다. 판매자가 정상적인 구매 에이전트와 악성 봇을 구별하고, 에이전트가 전달하는 구매 의도와 고객 관련 정보를 검증하도록 지원한다.
두 체계의 역할은 같지 않다. 구글의 발표는 사용자의 지시와 승인에 관한 증거를, 비자의 발표는 에이전트의 식별과 거래 정보의 전달을 다룬다. 이러한 장치를 활용하면 판매자는 누가 접속했고 어떤 구매를 요청하는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인증은 거래 당사자들이 합의해야 할 조건을 모두 대신하지 못한다. 에이전트가 고객의 지시를 잘못 실행한 경우와 판매자가 잘못된 상품 정보를 제공한 경우에는 책임을 다르게 따져야 한다. 취소와 환불은 누가 접수할지, 배송비와 처리 비용은 어떻게 부담할지도 정해야 한다.
아마존의 문제로 돌아가면, 에이전트가 신원과 구매 권한을 증명하더라도 아마존이 제시하는 참여 조건까지 충족했는지는 별도로 남는다. 주문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과 그 사업자와 거래하기로 합의하는 일은 같지 않다.
교훈 4. 브랜드도 주문을 받아들일 조건을 정해야 한다
아마존의 대응을 다른 브랜드가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외부 에이전트가 새로운 고객을 데려다준다면 적극적으로 연결하는 편이 유리할 수 있다. 다만 주문이 늘어난다는 기대만으로 거래 조건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먼저 에이전트에 제공하는 정보가 실제 판매 조건과 맞아야 한다. 가격과 재고가 언제 갱신되는지, 배송비를 포함한 최종 금액은 어디에서 확인하는지, 반품 제한은 주문 전에 전달되는지 살펴야 한다. 추천 단계에서 누락된 조건이 결제 이후에 드러나면 고객과 판매자 모두 추가 업무를 떠안게 된다.
고객을 응대할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배송이 지연됐을 때 직접 알릴 수 있는가. 고객이 에이전트에 취소를 요청하면 판매자에게 언제 전달되는가. 반품 상담에 필요한 주문과 승인 기록은 누가 보관하는가. 구매를 중개한 서비스와 상품을 판매한 브랜드 사이에서 고객이 같은 설명을 반복하게 해서는 곤란하다.
비용도 계산해야 한다. 새로운 주문에서 수수료와 추가 고객지원, 반품 비용을 빼고도 이익이 남는지 봐야 한다. 기존 고객이 구매 경로만 바꾼 것인지, 브랜드를 몰랐던 고객이 새로 들어온 것인지에 따라서도 효과가 다르다.
아마존처럼 큰 고객 기반을 가진 사업자는 외부 에이전트에 조건을 요구할 수 있다. 다른 브랜드는 고객을 많이 확보한 에이전트 사업자와 협상해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연동 초기에 고객 정보와 주문 기록에 대한 접근 범위, 비용과 책임을 정해야 하는 이유다.
에이전트 사업자는 고객에게 구매를 맡길 이유를, 판매자에게는 주문을 받아들일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아마존의 거부는 후자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고객의 선택을 받았더라도 판매자의 참여를 얻지 못하면 구매를 끝낼 수 없다.
브랜드에 필요한 질문도 “AI가 우리 상품을 추천하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그 추천이 어떤 조건의 주문으로 들어오는지, 비용을 반영한 이익은 얼마인지, 구매 이후 고객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지까지 확인해야 한다. 고객이 AI에게 쇼핑을 맡겨도 판매자가 져야 할 책임은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