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지난 레터에서 '팬심'에 대해 나누었던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어머니의 최애 가수 박지현 님의 콘서트나 행사를 매년 두 차례 정도 함께 가고 있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그의 카니발 차량 번호까지 외워가며 앞에서 대기하고 영상을 찍어대는, 이른바 '사생팬'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었죠.
올해도 어김없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그의 콘서트를 위해 오후 반차를 내고 어머니와 함께 '엔돌핀' 응원봉을 흔들며 공연을 즐겼습니다. 심지어 이번에 EV9으로 바뀐 차량 번호까지 새로 메모해 왔으니, 이 정도면 참 효녀 맞죠?
공연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와 어머니와 간단히 야식을 먹는데,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듣고는 그만 '졌다' 싶었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 지현이 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긴 연습에 다이어트까지 병행하느라 많이 지친 것 같은데, 그의 심신에 안정과 건강을 주시고…." 한참 이어지는 기도를 듣다 보니, 딸을 위한 기도는 맨 마지막이더군요. "우리 딸도 건강하게 직장 생활 잘하게 해주세요."
어이가 없어 한바탕 웃음이 터졌지만, 문득 깨달았습니다. '스타'나 '브랜드'는 단순히 돈으로만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진심 어린 '마음'에서 그 진정한 가치가 결정된다는 사실을요. 잘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들이 하나둘 모여, 돈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브랜드가 단순히 지불한 금액만큼의 효용을 주는 대상을 넘어선 무엇이라는 점을 다시금 깊이 고민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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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지켜라"던 자전거 천국 네덜란드,
왜 테슬라에게 '핸들'을 맡겼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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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네덜란드 하면 어떤 풍경이 그려지시나요? 아마 끝없이 펼쳐진 자전거 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수백만 대의 자전거일 거예요. 그런데 최근 이 '자전거의 성지'가 유럽 최초로 테슬라의 자율주행 기술인 FSDFull Self-Driving Supervised 주행을 승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언뜻 보면 상극처럼 보이는 자전거와 자율주행, 네덜란드는 왜 이런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을까요?
"아이들의 살해를 멈춰라"
네덜란드가 처음부터 자전거에 진심이었던 건 아니에요. 1970년대 네덜란드도 자동차 사고로 몸살을 앓았죠. 한 해에 무려 5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도로 위에서 목숨을 잃자, 참다못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들의 구호는 단 하나, '스톱 더 킨데르모르트(Stop de Kindermoord, 아이들의 살해를 멈춰라)'였어요.
이 처절한 외침은 네덜란드의 도로를 자동차 중심에서 '사람과 자전거' 중심으로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이번 테슬라 승인 역시 이 '안전'의 연장선에 있어요. 과거엔 자전거 도로를 따로 만드는 물리적 분리로 아이들을 지켰다면, 이제는 인간의 실수를 막아주는 인공지능이라는 디지털 방어막을 입히려는 거죠. 네덜란드에게 자율주행은 단순한 편리함이 아니라, 도로 위 생명을 지키는 '현대판 안전 벨트'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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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흐름, "이미 도로는 테슬라 세상"
현실적인 이유도 강력해요. 2024년 기준, 네덜란드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테슬라 모델 Y입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미 테슬라를 가장 많이 타고 있고, 전기차 전환 속도도 유럽에서 손꼽히게 빠르죠. 게다가 테슬라의 유럽 본사가 바로 암스테르담에 있다는 점도 한몫했어요. 정부 입장에서는 자국 도로를 가장 많이 달리는 차의 안전 시스템을 공식적으로 검증하고 관리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선택이었을 거예요.
온실 속 화초보다 거친 야생의 실전 근육
님,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역발상'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보통 "자전거가 많으니 자율주행이 더 위험할 거야"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네덜란드는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우리 도로에서 살아남는 기술이야말로 진짜 믿을 수 있는 기술이다"라고요.
철학적으로 조금 어렵게 말하면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라고 하는데요, 쉽게 풀면 '현장에서 굴러보며 얻은 진짜 실력'이라는 뜻이에요. 미국처럼 뻥 뚫린 고속도로에서 배운 데이터는 네덜란드의 복잡한 골목길에선 아무 소용이 없거든요. 그런 데이터는 어디서나 다 통할 것 같은 '착각'만 줄 뿐이죠.
네덜란드는 테슬라가 책상 앞에 앉아 세상 모든 걸 다 안다고 믿는 오만함(신 흉내, God-trick)을 버리고, 실제로 자전거와 보행자 사이에서 부딪치며 '진짜 실전 근육'을 키우게 만든 거예요. 테슬라의 화면이 자전거 한 대 한 대를 정확히 인식해내는 모습을 확인하며,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복잡한 도로를 가장 정교한 'AI 훈련소'로 내어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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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그다음은?
이 결정은 유럽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거예요. 벤츠나 BMW 같은 독일 차들이 '안전'과 '책임'을 이유로 머뭇거릴 때, 네덜란드는 실용적인 실험을 먼저 시작했으니까요. 만약 자전거가 들끓는 네덜란드 도로에서 테슬라가 사고율을 획기적으로 낮춘다면, 보수적인 독일이나 프랑스도 더 이상 문을 걸어 잠글 명분이 사라지겠죠.
결국 네덜란드는 기술을 단순히 받아들인 게 아니에요. 가장 위험한 환경을 기술로 정복해서, 시민들의 안전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려는 영리한 승부수를 던진 거랍니다.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전거 옆을 소리 없이 지나가는 테슬라를 보며 "AI니까 나를 더 잘 피하겠지"라고 안심하게 될까요? 아니면 "그래도 인간의 눈이 더 믿음직해"라며 핸들을 꽉 쥐게 될까요? 도로 위의 주도권이 인간에서 기계로 넘어가는 이 짜릿한 과도기, 그 중심에 '자전거 천국' 네덜란드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흥미롭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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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차량국(RDW) - '기술을 통한 안전 강화'
1년 6개월간의 '현미경 검증'
네덜란드가 결코 문턱을 낮춰준 게 아니라는 증거는 바로 테스트 기간에 있어요. RDW는 이 시스템을 승인하기 전까지 무려 1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단순히 "테슬라니까 해줄게"가 아니라, 네덜란드의 복잡한 도로 환경(자전거, 보행자 등)에서 정말 안전한지 아주 오랫동안 지켜본 거죠.
'인간의 실수'를 보완하는 장치
RDW는 운전 보조 시스템이 제대로 사용될 경우, 운전자의 주행 업무를 지원해 도로 안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어요.
- 사람은 피곤하거나 한눈을 팔 수 있지만, 시스템은 지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 거예요.
- 특히 테슬라의 시스템은 운전자를 지속적으로 엄격하게 모니터링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보조 시스템보다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자율주행'이 아닌 '감독형(Supervised)'의 강조
네덜란드가 승인한 것은 차가 알아서 다 하는 '완전 자율주행'이 아니라, 운전자의 감독이 반드시 필요한 'FSD Supervised'라는 점이 핵심이에요.
- 운전자는 기능을 켜기 전 튜토리얼을 보고 퀴즈까지 맞춰야 합니다.
- "이 시스템은 당신의 차를 자율주행차로 만드는 것이 아니니 방심하지 마라"는 경고를 계속해서 주입하죠.
결국 네덜란드는 "위험하니까 막자"가 아니라, "철저히 감독하고 교육한다면, 기술이 인간의 실수를 줄여 자전거와 보행자를 더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셈이에요. 보수적인 안전 기준을 '기술의 적극적 활용'으로 풀어낸 독특한 사례라고 볼 수 있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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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은 왜 미사일과 함께 밈meme을 발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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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오랫동안 파괴의 언어로 이해되어 온 개념입니다. 누가 더 많은 타격을 입었는지, 무엇이 파괴되었는지, 어느 쪽의 군사력이 우위에 있는지와 같은 지표들이 전쟁을 설명하는 주요 기준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전쟁은 매우 물질적인 사건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폭발은 은유가 아니며, 공습은 해석 이전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전쟁은 이제 파괴되는 순간뿐만 아니라, 해석되는 순간에도 다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Financial Times가 분석한 이란의 사례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이 이어지고, 트럼프가 강경한 위협을 내놓던 상황에서도 이란은 자신을 단순히 ‘공격받는 국가’로만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국 대사관 계정과 친정부 성향의 온라인 채널을 통해 밈, 짧은 영상, AI 기반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유통하며 전쟁의 의미를 재구성하려 했습니다.
이 사례에서 핵심은 단순한 콘텐츠 생산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전쟁의 의미를 먼저 정의하는가입니다.
현실의 전장에서 이란은 분명한 타격을 입은 상황입니다. 기사에서는 지도자와 민간인의 피해, 산업 기반의 훼손, 교통망과 연구시설의 파괴가 언급됩니다. 물리적 차원에서 보면 이란은 방어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전혀 다른 인식이 형성됩니다.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조급하고 우스운 존재로 보이며, 트럼프는 조롱 가능한 캐릭터로 축소됩니다. 반면 이란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응하고 있는 주체로 인식됩니다.
사실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실을 해석하는 방식이 재구성된 것입니다.
이를 구조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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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변화의 핵심은 AI 기술에 있는 것일까요. 이 글의 결론은 다릅니다.
AI는 본질이 아니라 조건입니다.
AI는 이미지와 영상을 빠르게 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생산 능력 자체가 곧 해석을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보유 여부가 아니라, 그 기술을 통해 무엇을 의미하게 만들었는가입니다.
이란이 수행한 것은 단순한 콘텐츠 제작이 아니라, 의미의 재구성입니다. 복잡한 국제정치 상황을 인터넷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번역함으로써, 트럼프를 하나의 캐릭터로 만들고, 미국을 조롱 가능한 대상으로 재배치했습니다. 이는 사실을 설명하는 접근이 아니라,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이 과정을 흐름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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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사건 발생 → 온라인 형식으로 재가공 → 밈 · 짧은 영상 · AI 콘텐츠로 유통 → 감정 반응 유도 → 반복과 확산 → 사건의 의미가 고정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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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화면에 레고 스타일의 AI가 제작한 전쟁 테마 영상이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국방장관 피트 헤그세스의 사진 앞에 재생되고 있다. © Chris Delamas/AFP/Getty Imag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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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조에서 밈은 단순한 유머가 아닙니다. 밈은 설명을 생략하고 결론을 앞당기는 장치입니다. 밈은 긴 설명 없이도 특정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이 상황은 이렇게 보면 된다”는 프레임을 먼저 제시하고, 이후의 정보는 그 틀 안에서 다시 읽히도록 만듭니다.
기사에서 인용된 연구자의 표현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란은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고, 미국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문장은 메시지와 이야기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메시지는 전달되고 종료되지만, 이야기는 반복되고 확산되며 기억됩니다. 사람들은 정보를 공유하기보다, 구조화된 이야기를 공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온라인 환경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주체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쪽이 아니라, 더 강한 서사 구조를 설계한 쪽입니다.
이란은 다양한 요소를 하나의 흐름으로 결합했습니다. 정치적 이슈, 개인적 스캔들, 국제 정세를 하나의 감정선으로 연결함으로써, 사람들이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인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인식 설계에 가깝습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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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글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누가 먼저 정의했는가입니다.
이 통찰은 전쟁을 넘어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기술은 점점 평준화되고 있으며, AI 역시 많은 주체들이 활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기술의 보유 여부보다, 해석을 선점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경쟁 요소로 작용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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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브랜드 관점에서 읽으면
이 대목은 본론의 바깥에 두는 편이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만, 브랜드를 다루는 입장에서는 간과하기 어려운 지점입니다. 이 기사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란이 밈을 사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란이 미국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기사 속 표현을 빌리면, 이란의 게시물은 “미국 행정부의 언어로, 미국 행정부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란은 영어권 밈 문화에 익숙한 디지털 인력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할 이슈를 정교하게 겨냥했습니다. 그 목적 역시 명확했습니다. 관심을 유도하고, 미국 내부의 분열을 확대하며, 트럼프를 압박하는 데 있었습니다.
브랜드 역시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를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가 아닙니다. 타깃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무엇에 반응하며, 어떤 맥락 속에서 세상을 해석하는지를 선행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브랜드의 시각도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결국 브랜드의 경쟁력은 ‘우리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전달하느냐’에 있기보다, 타깃이 이미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문법 안에서 우리의 의미를 얼마나 정교하게 재구성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밈은 단순히 가벼운 콘텐츠 형식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타깃에 대한 이해 수준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해석의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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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버텼던 자리에,
당신의 팀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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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처음부터 불편한 사람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데뷔 전부터 이미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TV 다큐멘터리 연출가로 일하던 시절, 그가 카메라를 들이댄 곳은 생활보호를 끊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난치병 여성의 이야기, 국책과 복지 사이에서 고립된 관료의 죽음, 에이즈를 공개 고백한 동성애자의 삶이었습니다. 일본 주류 사회가 체계적으로 외면하던 장면들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알면서도 카메라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선택은 그를 고립시켰습니다.
조직은 그를 불편해했다
장편 영화로 넘어온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실제 아동 방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칸 영화제에서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지만, 일본 국내 반응은 조용했습니다. 불편한 현실을 굳이 꺼낸다는 분위기가 작품을 감쌌습니다.
2018년, 《어느 가족》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균열은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침묵했습니다. 뒤늦게 문부과학대신이 축하 의사를 밝혔지만, 고레에다는 이를 공개적으로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한때 일본 영화가 국책에 동원돼 불행을 초래했다. 공권력과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다."
그러자 공격이 쏟아졌습니다. "반일 감독", "세금으로 국가 얼굴에 먹칠했다", "일본인을 욕보인다." 온라인은 뜨거웠고, 자민당 일부에서도 공개 비판이 나왔습니다. 30년 가까이 일본 영화계에서 작업해온 감독에게, 조직은 그렇게 반응했습니다.
그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 영화계는 한국에 뒤처졌다"고 더 큰 목소리로 비판했습니다.
우리 곁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모임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을 꺼내는 사람, 모두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방향에 조용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집단의 불편한 현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직장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오래된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저 사람을 어떻게 다룰까. 아니면, 저 사람은 왜 저러는 걸까.
이 두 질문 사이의 거리가, 우리가 그 관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결정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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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이 반복하는 세 가지 실수
불편한 사람을 마주한 집단은 국적과 규모를 가리지 않고 비슷한 패턴을 반복합니다.
첫 번째는 통제입니다. 발언권을 줄이거나, 공식 자리에서 무시하거나, 분위기로 눌러 더 이상 꺼내지 못하게 만듭니다. 당장은 조용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두 번째는 외부화입니다. 통제가 여의치 않으면 그를 '우리 편이 아닌 사람'으로 만듭니다. "분위기를 모르는 사람", "왜 저렇게 예민하지"라는 말이 뒤따릅니다. 침묵하는 다수는 자연스럽게 배제에 동조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사후 편입입니다. 그가 결국 옳았다는 것이 드러나면, 집단은 슬그머니 그를 '우리가 알아본 사람'으로 흡수합니다. 고레에다의 영화는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일본에서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를 공격하던 목소리는 조용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용기 있는 수용이 아닙니다. 결과가 확인된 다음에야 편을 바꾼 것입니다.
불편한 사람이 실제로 하는 일
그들을 낭만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편한 사람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 모든 갈등이 창의적 긴장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진짜 불편한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집단이 회피하는 질문을 스스로 삭제하지 못합니다. 고레에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회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록하고 싶다." 분노가 아니라 관찰이 그의 동력이었습니다.
가장 오래 버티는 불편한 사람은 대체로 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스템을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외면하는 것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떠나지 않습니다. 고레에다가 일본 영화계를 떠나지 않고 더 큰 목소리로 비판했던 것처럼, 그들은 안에 남아 있기에 그 목소리가 파괴가 아닌 요구가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반항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우리가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것
불편한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의 모든 주장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첫째, 그들이 꺼내는 질문을 즉각 닫지 않는 것입니다. 불편한 질문은 대부분 세 가지 운명을 맞습니다. 무시당하거나, 희석되거나, 공격받거나.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그 질문이 최소한 테이블 위에 올라올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답을 줄 수 없더라도, 그 질문이 존재할 공간을 만드는 것이 먼저입니다.
둘째, 그들을 '문제'가 아닌 '신호'로 읽는 것입니다. 불편한 사람은 종종 외부의 변화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최초의 경로입니다. 고레에다의 영화가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은 것은, 일본 사회의 변화를 세계가 일본 내부보다 먼저 읽고 있었다는 방증입니다. 그 신호를 먼저 알아챌 수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입니다.
셋째, 그 불편함이 나 자신을 향할 때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편한 사람이 꺼내는 질문 중 가장 날카로운 것은, 대개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그 관계의 깊이와 신뢰를 결정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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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버텼던 자리
고레에다는 일본이 그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거장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일본이 끝까지 그를 불편해했음에도, 그가 버텼기 때문에 거장이 된 것입니다.
그 버팀의 비용은 혼자 감당했습니다. 낙인을 견디고, 침묵을 견디고, 공격을 견디며 30년을 작업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곁에서,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가 혼자 감당하고 있는 비용이 얼마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까.
그 비용을 줄여주는 것. 그것이 불편한 사람을 '직시'한다는 것의 실제 의미입니다.
"불편한 사람을 견디는 것이 성숙함이 아니라, 그가 꺼내는 질문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성숙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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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비틀기]
최근 OpenAI CEO 샘 알트먼의 집에 화염병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지난 주말 새벽 3시 45분, 그의 집 외부에 던져진 화염병은 다행히 튕겨 나가 큰 피해 없이 끝났습니다.
알트먼은 사건 직후 블로그에 가족 사진을 공개하며 솔직한 심경을 밝혔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미지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가족을 꽤 사적으로 지키려고 하지만, 이번에는 다음에 누군가가 제 집에 화염병을 던지는 일을 막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사진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가장 강렬한 반성을 남겼습니다.
“이제 저는 한밤중에 깨어 있고 화가 나 있으며, 말과 서사의 힘을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트먼은 며칠 전 자신을 겨냥한 선동적인 기사가 AI에 대한 큰 불안과 맞물려 실제 폭력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words have power too”라고 강조하며, 서사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움직이고 사람들을 극단으로 몰아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AGI를 둘러싼 서사를 ‘반지의 제왕’에 빗대어 경고했습니다. “일단 AGI를 보면, 다시는 못 보지 않은 것처럼 될 수 없다. 그것은 진짜 ‘반지의 제왕’ 같은 역학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을 미치게 만듭니다.”
그는 AI가 모든 사람을 empower하고 번영을 가져올 도덕적 의무라고 재확인하면서도, 안전 확보와 기술 민주화, 사회 전체의 적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우리가 그 토론을 하는 동안, 수사(rhetoric)와 전술(tactics)을 완화하고, 집에서(비유적으로나 문자 그대로나) 폭발이 덜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번 사건과 알트먼의 글은 AI 시대에 서사가 지니는 무게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긍정적인 서사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더 나은 미래를 열지만, 선동적이고 극단적인 서사는 불안과 분열, 심지어 폭력을 낳을 수 있습니다.
서사는 현실을 만들어가는 강력한 힘입니다. AI 기술이 세상을 빠르게 바꾸는 지금, 우리가 만드는 말과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더욱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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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Snackletter]
📍 Writer: HMG경영연구원 미래트렌드연구팀 근무 중인 스낵지기
🛡️ Safety: 업무 보안 상 저촉/이슈가 없는 공공/외부 데이터 기반 작성
🤖 Assistant: AI 보조작가 '스낵이' (가끔 실수를 할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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